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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5 본문
닷새,
피곤함에 기숙사 침대 위에서 잠시 눈을 감았다. 이곳에서 잠들고 싶지 않았지만 혼자 편히 자신을 숨기에는 이곳만큼 적당한 곳이 없었으니. 위로를 건네줄 수 없는 꼴로 다른 이의 위로를 받고 싶지 않았다. ... 사실, 그들의 다정이 무섭다. 아무에게도 기대거나 기대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정신을 잃은 것처럼 잠에 든다. 오늘은... 오늘은 생각보다 괴로워서. 그대로 얼마나 눈을 감았는지 모른다. 다행히도 악몽은 없었지만... 하하, 그렇겠지. 왜냐하면 지금이 악몽이나 다를 바가 없으니. 여기서 얼마나 더 최악으로 치닫겠는가. 일어나니 손에 무언가 쥐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구겨진 하얀 쪽지일 줄알았다. ...손을 펴보면 그것은 첫날 내 이름을 새긴 양피지. 찢어지고 구겨져 내 손안에 쥐어진 내 이름. 흔들리지 않겠다는 내 다짐.
아무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진심이 나를 죽이려고 한다.
덜어내면 편해질 것이라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변한다면 알 수 있을 것이라는 말도 믿지 않는다. 말뿐인 다정을 믿지 않는다. 그 모든 믿음 후의 후회가 무섭다는 것을 너희는 알고 있을지. 나는 항상 모르길 바란다. 아무도 모르길 바란다. 이곳에서 나가게 되더라도 난 모르길 바란다. ...이미 내 곁을 떠난 이들 또한... 내가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 한다는 것조차 모르길 바란다. 이것은 그저 내 혼잣말. 언젠가는 나조차 잊어버릴 혼잣말인 뿐이다. 조용한 방안에서 다시 양피지를 꺼낸다. 이번에는 단어가 아닌 문장으로, 누군가에게 전하는 글로 써 내려가기 시작한다.
친애하는 할아버지, 당신에게.
그 어떤 상황도 지속되면 언젠가는 익숙한 상황으로 변합니다. 저는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랑받았던 것도, 미움받았던 것도 그러했으니까요. 이런 나라면 그 어떤 상황이 와도 변하지 않는, 흔들리지 않는 자가 될 것이라고. 그렇기 때문에 당신이 제게 그런 자리를 주었을 거라고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어찌합니까. 내 사상과 감정은 모두 무너져내립니다, 할아버지. 제가 여기서 나가고, 졸업한 후에 당신의 모든 것을 물려받는다면.. 그것이 정말 맞는 일입니까. 제 알맹이까지 전부 알고 있다는 당신의 말은 틀렸습니다.
마지막 문장에 결국 펜이 부서진다.
갈 곳 없던 원망이 결국 내 근원에까지 다다랐다. 그 누구보다 존경하고 따랐던 자마저 이젠 원망스럽다. 왜 나를 버티지 못하게 하는 것인지, 왜 무너지고 난 이후에 다시 쌓는 방법을 알려주지 않았는지. 상실의 공포나 그 불안을 감당할 방법을 알려주지 않은 것이 억울했다. ...하지만 알고 있다. 이것이 옳지 않다는 점을. 그들이 가르칠 범위가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나 자신을 원망하기 싫었으므로... 나는 아직 나를 향한 기대를 거둘 수 없다. 펜의 잉크가 손끝을 물들인다. 장갑을 벗는다.
내기는 즐거웠나, 로젠하르트 퀼.
마지막까지 내기를 거는 네 모습을 보고 질려버렸다. 내기에 자신의 목숨까지 건 어리석은 친구야. 오래 보고 싶다던 말을 내가 믿지 말았어야 했나 후회해. ...그게 아니면 내가 더는 완벽하지 않아서 떠나게 된 건가. 아니면 내가 처음부터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건가. 그 어느 쪽이든 네게서 대답을 듣게 될 일은 없겠네. ...마지막으로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어. ...그래서 지금, 우리 관계가 변했다고 생각해?
네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는데, 데빈 리드.
이렇게 한순간에 사라지니 더이상 어디에 손을 뻗어야 할 지 모르겠어. 묻고 싶었던 말이 아직 쌓여있고, 나가서 보자는 약속조차 하지 못하고 이렇게 잃게 될 줄이야. 네가 이 게임에서 이겨서 살아 돌아가기 위해 그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는 사실을 알아. 그 먼 곳에서도 우리가 보인다면, 이 게임에 아직 머문다면.. 마지막이 어떻게 마무리되는지, 끝까지 봐주었으면 좋겠어. ... 더는 걱정은 덜고 편히 쉬길 바라.